청와대가 신설 디지털혁신비서관에 조경식 EBS 상임감사를 내정했다. 디지털혁신비서관의 역할은 디지털혁신 3대 전략분야인 ‘데이터 경제’, ‘디지털 정부혁신’, ‘디지털 미디어 산업’과 관련한 정책과제를 조율하는 것이라고 한다. 미디어의 디지털 혁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왔기 때문에 ‘디지털 미디어 산업’을 다루는 것은 전체 미디어 산업을 다루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노조와 미디어운동단체들은 그동안 정부의 미디어정책 컨트롤 타워가 부재함을 여러 차례 비판했다. 소통수석실은 홍보 외 미디어정책에 대한 전문성과 비전을 갖추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정부가 길을 잃은 사이 대한민국 미디어산업은 통신재벌과 대형, 글로벌 미디어사업자들에 의해 장악된 형국이다. 문제는 이 같은 흐름이 산업 재편에 그치지 않고 ‘미디어 공공영역’, ‘시민의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미디어의 공공성보다는 재벌과 족벌언론의 이익을 좇는 세력, 공정한 언론보다는 집권세력에 부역하는 언론을 원했던 과거 정권은 지난 10여 년간 집요하게 미디어 공공영역을 붕괴시켜왔다. 언론장악 세력은 허무맹랑한 근거와 위법한 방법으로 오늘날의 종합편성채널을 탄생시키고, 신문/방송의 공적 규제를 완화했다. 족벌언론과 통신재벌의 입장만 철저히 대변했다. 이명박정부 시절 최시중으로 상징되는 미디어 장악 체제의 중심에는 통신관료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방송통신 규제 기관을 휘어잡은 데 힘입어 방송계로 힘과 영역을 넓혀 왔다. 최시중의 1기 방통위 방송정책국장은 정보통신부 출신 국장들이 차지했고, 박근혜 정권 출범과 함께 유료방송 분야를 떼어내 만든 미래창조과학부 방송 정책 분야도 같은 흐름이 이어졌다. 유료방송을 관장하는 미래부 방송진흥정책국장 역시 정통부 출신 관료들이 장악했다.
2012년 11월, 옛 체신부와 정통부출신인 신용섭 씨가 교육공영방송 EBS 사장에 임명되고, 2016년 2월에는 체신부와 정통부에서 잔뼈가 굵은 조규조 씨가 EBS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역시 조 내정자도 최시중 시절 방통위에서 기획재정담당관과 대변인을 지낸 뒤 박근혜 정부 땐 미래창조과학부에서 정책기획관과 대변인, 방송진흥정책국장을 맡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도 방송진흥정책국장과 방송통신위 사무처장을 지낸 후 지난해 4월부터 EBS 감사로 재직 중이다.
청와대에서 미디어정책을 담당하는 비서관이든, 공영방송의 임원이든 과거 정통부 출신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 될 건 없다. 하지만 그 궤적이 방송통신의 공공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제대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통신관료들의 대형 로펌, 유료방송 사업자의 카르텔은 매우 심각했다. 미래부 신설과 통신재벌 밀어주기는 결국 통신재벌3사가 대한민국 유료방송 시장 점유율을 90% 가까이 장악하게 만들었다. 지역성, 이용자권리 등 공공성은 명분으로만 존재하고 미디어산업의 규제 완화는 혁신성장으로 둔갑했다. 이름을 바꾼 문재인 정부의 과기정통부 역시 청산과 정책 전환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미디어산업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미디어 공공영역’, ‘시민의 커뮤니케이션 권리’의 위기와 맞닿아 있다. 마침 청와대에서 이 문제를 관장할 역할이 신설됐는데, 이 중요한 자리에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방송통신 관계 부처에서 승승장구한 통신관료가 내정된 것을 선뜻 환영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탓이 아니다. 과거의 상처 때문이고, 현재도 과거의 상처가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조 내정자를 앞세워 추진하려는 디지털미디어 산업 발전의 방향은 무엇인가? 다른 설명이 없다면 이번 인사는 통신재벌과 지배적 위치의 미디어사업자 손들어주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방통위와 과기정통부로 이원화된 규제체제의 통합 논의도 차단될 가능성이 크다. 과연 이것이 최선인가?
문재인 정부에 거듭 촉구한다. 미디어산업의 기술적, 외형적 성장에만 주목하지 말고 제발 구조와 실체를 들여다보길 바란다.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하에서 시민의 권리와 미디어의 공적 책무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부터 시급히 고민해주길 바란다. 미디어산업에 대한 정부 정책은 시장 따라잡기가 아니라 가치와 목표의 설정이 중요하다. 과거 정권의 미디어 장악에 복무한 인사, 통신 관료 출신 인사에 대한 우려는 쉽게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언론·미디어에 대한 관점을 바꾸고 미디어정책 개혁에 나서야 한다.
2020년 1월 17일
전국언론노동조합